
선수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영구결번, 1939년 루 게릭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영구결번이 된 인물은 약 190명으로 상징성과 상업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도 매우 이루기 어려운 업적이다. 이중 리그와 팀을 넘나드는 활약을 하며 두 팀에 영구결번이 된 전설은 단 14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한층 높여 세 팀으로 바꾸면 어떨까? 세 곳 이상의 구단에서 자신의 등번호와 명예를 영원히 남긴 단 세 명의 선수를 소개한다.


재키 로빈슨 NO. 42 (MLB)
먼저, 세 팀을 넘어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을 지정한 인물인 재키 로빈슨이다. 20세기 메이저리그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로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데뷔했다.1 인종차별이 극심해 흑인 야구 선수들은 니그로리그에서 뛰던 시절, 당시 다저스의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의 제안을 받아 MLB에 데뷔했고 뛰어난 활약으로 메이저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2 2년 뒤인 1949년에는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하며 원석 같았던 흑인 선수의 가치를 높였고, 로빈슨은 10년간 다저스에서 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비롯해 여러 차례 올스타에 선정되며 당대 최고의 2루수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빈슨이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사실상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로서 여러 흑인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의 포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여러 인권 운동에 직접 나섰기 때문.3 로빈슨이 야구를 넘어 미국 사회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그리고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1972년 다저스 구단 내 영구결번된 뒤, 1997년 버드 셀릭 당시 MLB 커미셔너의 선언을 통해 42번은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4 재키 로빈슨이 MLB에 데뷔한 지 정확히 50주년을 맞이한 때였다.


더불어, 2020년부터 그가 데뷔한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해 모든 선수가 42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선수로서의 뛰어난 성적과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업적을 바탕으로, 로빈슨은 단 한 팀에서 뛰었음에도 모든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놀란 라이언 NO. 30(LA 에인절스), NO. 34(휴스턴 애스트로스, 텍사스 레인저스)
아직도 첫 손에 꼽히는 최강의 파이어볼러이자 유일무이한 5,000 탈삼진의 주인공, 놀란 라이언이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세 팀에 영구결번을 남겼다.5 1966년 뉴욕 메츠에서 데뷔해 1971년 데뷔 첫 10승을 기록하며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라이언은 올스타 유격수 짐 프레고시가 포함된 1 대 4 트레이드를 통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이적했다.6 유니폼을 갈아입은 그는 투구폼 교정과 커브 장착을 통해 곧바로 19승-329K를 기록하며 에인절스의 에이스로 급부상, 1973년 383K로 한 시즌 탈삼진 신기록을 작성한 것을 포함해 8시즌 간 138승-2181.1이닝-2416K-ERA 3.07이라는 기록을 쌓아 올렸다. 1975년 제외 7시즌 탈삼진왕이라는 압도적인 수상실적은 덤.

이후 FA로 고향인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 등번호를 루키 때 달았던 34번으로 변경했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이에도 라이언에게 에이징 커브란 없었고, 1981년과 1987년 커리어 사상 유이한 평균자책점 1위를 달성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7 그리고 저조한 타자들의 득점 지원 속에서도 9시즌 간 106승-1854.2이닝-1866K-ERA 3.13을 기록, 팀의 짠물 야구 기조를 이끌며 애스트로스의 창단 첫 챔피언십 시리즈 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에인절스 시절 5.4에 달했던 9이닝당 볼넷 허용률을 3.9까지 줄이며 제구 또한 안정화된 제2의 전성기였다.

어느덧 40세를 넘기며 황혼기를 바라보던 라이언의 커리어, 그는 1989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과 동시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다. 레인저스에서의 첫 시즌부터 300K를 넘기며 14년 만에 300K 시즌을 보냈고, 동년 8월 또 한 명의 레전드인 리키 헨더슨을 상대로 대망의 5,000K를 달성했다. 이듬해에는 300승 돌파 및 11번째 탈삼진왕을 달성했고 1991년 개인 통산 7번째이자 마지막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엄청난 노익장을 과시했다.8 그리고 1993년, MLB에서의 27번째 시즌을 끝으로 라이언은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324승-5386이닝-ERA 3.19, 그리고 아무도 깨지 못할 탈삼진 5,714개-볼넷 2,795개-노히트 노런 7회라는 기록과 함께.
커리어를 보낸 4팀이 전부 1960년대에 창단되어 전성기인 팀에 합류했다기보다는 본인이 팀의 성장을 이끌어야 했고, 그 결과 292패라는 압도적인 패배를 쌓았다. 그로 인해 ‘투수는 승리가 중요하다.’는 당대의 여론에 의해 사이영 상은 단 한 번도 타지 못했지만, 에인절스-애스트로스-레인저스 세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라이언의 진정한 위상을 증명한다. 은퇴 시즌에도 100마일을 넘나드는 강속구와 27시즌을 살아남은 압도적인 스태미나의 상징, 놀란 라이언은 메이저리그 서부 개척 시대의 상징이 되어 세 번의 영광을 맞이했다.



프랭크 로빈슨 NO. 20(신시내티 레즈, 볼티모어 오리올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9)
최초의 양대 리그 MVP 수상자이자 역사상 유일한 신인왕-정규 시즌-올스타전-월드 시리즈 MVP 수상자인 프랭크 로빈슨이 세 팀에 이름과 등번호를 남긴 마지막 인물이다. 1956년 레즈에서 데뷔한 로빈슨은 루키 시즌부터 주전 좌익수를 차지, 득점왕을 수상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이후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커리어를 이어간 그는 1961년 37홈런-124타점-OPS 1.015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 팀을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10 10시즌 간 324홈런-1009타점을 쌓으며 원클럽맨으로 자리 잡나 했던 순간, 구단의 선택은 트레이드였다.

구단에 자주 반기를 드는 성격으로 갈등이 잦았던 로빈슨은 단장의 강단으로 인해 1966년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로빈슨의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다. 오리올스에서의 첫 해 49홈런-122타점-타율 0.316를 기록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 자신의 커리어 하이 경신은 물론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초의 양대 리그 MVP 수상자에 이름을 남겼다.11 더불어 동년 월드 시리즈에서 LA 다저스를 만나 2홈런-OPS 1.232로 대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MVP까지 수상하는 겹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1971년 올스타전 MVP와 통산 500홈런 달성 등 최악의 투고타저 시기에도 불구 로빈슨은 6시즌 동안 179홈런-545타점-타율 3할을 기록하며 오리올스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오리올스를 떠난 후, 그의 커리어는 저니맨에 가까웠다. 해마다 팀을 옮겼으며 선수로서 가디언스에 남긴 족적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로빈슨이 가디언스의 영구결번이 된 이유는 따로 있으니, 바로 1975년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선수 겸 감독으로서 2년간 활약했으며, 통산 2943안타-586홈런-1812타점으로 3000안타-600홈런-2000타점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감독에 집중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마쳤을 정도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 외에 감독 커리어는 딱히 인상깊지 않았고, 아쉽게도 단 한 번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경험하지 못한 채 커리어를 마감해야 했다.

감독 은퇴 전, 레즈와 오리올스에서는 일찍이 20번이 영구결번되었으나 가디언스에서의 영구결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놀란 라이언보다 10년 앞서 데뷔했음에도 3번째 영구결번은 20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2017년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업적을 기리며 마침내 가디언스에서도 그의 등번호 20번이 영구결번되었다. 재키 로빈슨-놀란 라이언에 이은 3번째, 그리고 감독으로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렇게 프랭크 로빈슨 역시 세 번째 영광을 맞이했다.
세 곳 이상의 구단에서 영구결번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한 선수가 남긴 발자취가 특정 지역과 팀의 경계를 넘어, 메이저리그 전체의 역사와 문화에 새겨졌음을 의미한다. 재키 로빈슨의 42번이 보여준 것은 한 인간의 뛰어난 기량을 넘어선 용기와 상징성이었고, 놀란 라이언의 30번과 34번은 오랜 세월을 관통하며 불멸에 가까운 투구와 도전정신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프랭크 로빈슨이 남긴 20번은 선수로서의 성취와 더불어 리더로서의 발걸음까지 아우르며 세 구단 이상의 역사에 깊게 각인되었다.
오늘도 경기장을 찾는 수많은 팬은 경기장에 걸린 번호를 바라보며, 단순한 숫자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와 시대의 기억을 마주하고 있다. 세 곳 이상의 구단에서 영구결번 될 4번째 인물은 누가 될까. 언젠가 또 다른 전설이 나타나 이 긴 서사에 한 줄을 더 보탤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 당시 다저스의 연고는 뉴욕이었으며 이후 1958년 로스엔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다. ↩︎
- 최초의 메이저리그 신인왕, 당시에는 양대 리그 통틀어 한 명에게만 수상했으니 더욱 대단한 기록이다. ↩︎
- 로빈슨이 선수로 활약하던 때는 흑인의 투표권 자체가 없었던 시기로 흑인은 버스 앞좌석도 타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불평등을 없애고자 로빈슨과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들의 민권 운동은 계속됐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으로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완전히 철폐되어 그 결실을 맺었다. ↩︎
- 한편, 이미 42번을 달았던 선수들에게는 번호를 바꾸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선수가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뉴욕 양키스의 NO. 42 마리아노 리베라. ↩︎
- 다만, 놀란 라이언이 활약하던 시기 애스트로스의 소속은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였다. 아메리칸 리그로 옮긴 것은 2013년의 일. ↩︎
- 구단명만 바뀌었을 뿐 연고지는 현재와 같다. ↩︎
- 그러나 타자들의 암담한 득점 지원 때문에 승리는 두 시즌 도합 단 19승에 불과하다. 심지어 1987년에는 ERA-탈삼진 1위임에도 8승을.. ↩︎
- 1973년 첫 노히트 노런 달성 이후 무려 18년이 지난 시점, 참고로 세 팀 소속으로 전부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괜히 세 팀에서 영구결번이 된 게 아니다. ↩︎
- 활약하던 당시 팀명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다. ↩︎
- 그러나 하필이면 같은 해 홈런 신기록을 두고 경쟁한 로저 매리스&미키 맨틀로 인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심지어 월드 시리즈에서도 뉴욕 양키스를 만나 준우승을 기록. ↩︎
- 40년이 넘도록 아무도 이루지 못한 두 번째 양대 리그 MVP의 주인공은 또 한 명의 레전드이자 야구의 판도를 바꾼 유니콘, 오타니 쇼헤이가 이뤄냈다.(2021&2023 AL, 2024 N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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