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World’ : 월드 시리즈 3승의 지배자들

‘가을의 전설’이라는 말처럼, 우승이 걸린 포스트시즌 무대에서는 늘 상식을 뛰어넘는 ‘미친 선수’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특히 단기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에이스의 무게감은 정규시즌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7전 4선승제의 타이트한 월드 시리즈 일정 속에서 팀의 운명을 짊어진 에이스들은 한 시리즈에 세 번이나 마운드에 오르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등판을 넘어 ‘3승’을 거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4선승제에서 한 투수가 3승을 책임진다는 것, 이는 팀 승리의 75%를 홀로 만들어냈다는 뜻이자 상대 팀을 완벽하게 압살해버린 원맨쇼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분업화가 정착된 현대 야구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이 숫자가, 2025년 월드시리즈 MVP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투혼을 통해 다시금 세상에 소환되었다. 경기장의 중심인 마운드 위에서 시리즈를 지배했던 역대 14명의 투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신화를 남긴 4명의 전설을 되짚어본다.


1905년 크리스티 매튜슨-뉴욕 자이언츠
월드 시리즈 역사에 첫 전설을 남긴 인물이자,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월드 시리즈 3완봉의 주인공이다. 1900년 자이언츠에 입단해 이듬해부터 20승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한 매튜슨, 1905년에는 31승-ERA 1.28-206K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리그를 지배하는 스타로 자리 잡게 된다. 동시에 팀도 내셔널 리그 패권을 거머쥐며 월드 시리즈 진출, 그들의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우승자였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였다.
자이언츠의 1차전 선발은 당연히 매튜슨, 애슬레틱스의 선발은 역시나 팀의 에이스였던 에디 플랭크였다. 결과는 매튜슨의 압승, 4피안타 무사사구 6K로 가볍게 완봉승을 거두었다. 플랭크 또한 9이닝 3실점 완투로 호투했으나 매튜슨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후 2차전은 애슬레틱스가 승리하며 1승씩 나눠 가진 양 팀, 3선발 체제를 가동한 애슬레틱스는 3차전 선발로 당해 18승-ERA 1.84를 기록한 앤디 코클리를 선택했다. 반면 자이언츠는 이틀 쉰 1차전 선발 매튜슨을 선택했고, 매튜슨은 다시 한번 4피안타 8K 완봉승을 달성하며 애슬레틱스 타자들을 얼려버렸다. 완벽에 완벽을 더한 상대 에이스의 괴력으로 4차전 승리가 더욱 절실해진 애슬레틱스, 그러나 한 점 차로 패배하며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이 꺼낸 5차전 카드는 2차전 선발 조 맥기니티, 그리고 그의 상대는 단 하루의 휴식 후 다시 마운드에 오른 크리스티 매튜슨이었다.
0의 행진을 이어가며 살얼음판 분위기를 이어가던 경기, 하지만 5회 자이언츠의 선취점으로 분위기가 기울었고, 8회에는 매튜슨 본인이 타자로 득점에 성공하며 경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9번 타자 매튜슨은 9회 다시 마운드에 올랐고, 3연속 땅볼로 다시 한 번 실점 없이 경기의 문을 닫았다. 역사상 유일무이한 월드 시리즈 3완봉승을 완성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매튜슨은 팀의 우승과 함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월드 시리즈 3승을 기록했다.


1968년 미키 롤리치-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68년 정규 시즌의 주인공은 단연 데니 맥클레인이었다. 무려 31승을 거두며 34년 만에 ’30승 투수’의 명맥을 이은 그는, 사이 영 상과 정규시즌 MVP를 독식하며 타이거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팬들의 이목이 ’31승 투수’ 맥클레인과, 이에 맞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의 맞대결에 쏠린 것은 당연했다. 17승-197K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 미키 롤리치였지만, 두 거인에 가려진 그는 그저 든든한 2선발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리즈의 막이 오르자,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차전 선발로 나선 깁슨이 월드시리즈 신기록인 17K 완봉승이라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맥클레인을 무너뜨린 것. 팀의 에이스가 무너진 절망적인 상황, 반격의 서막을 연 것은 롤리치였다. 그는 2차전에서 9이닝 6피안타 9K 1실점 완투승으로 응수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하지만 4차전 리매치에서 맥클레인이 깁슨에게 또다시 완패를 당하며 시리즈는 1승 3패, 타이거스는 벼랑 끝에 몰렸다.


엄청난 부담과 함께 5차전 선발로 나선 롤리치, 1회부터 3실점 하며 고전했으나 타선이 뒷심을 발휘하며 역전했고 롤리치 본인도 추가 실점 없이 남은 이닝을 소화해 3피안타 8K로 다시 한번 완투승을 기록했다. 벼랑 끝에서 살아난 타이거스는 맥클레인에게 이틀 휴식 후 6차전 선발을 맡기는 강수를 던졌고, 완투승이라는 최고의 결과로 돌아오며 끝내 시리즈는 7차전으로 향했다. 양 팀 다 뒤가 없는 혈전 속 타이거스는 이틀 쉰 롤리치를, 카디널스는 사흘 쉰 깁슨을 선발로 내세우며 최종전을 맞이했다.
직전 시즌 7차전 완투승 및 월드 시리즈 3승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깁슨의 피칭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러나 7회 타이거스의 연속 안타로 마침내 0의 균형이 깨졌고, 9회 1득점을 더해 사실상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완봉승을 노린 롤리치는 9회에도 올라왔고 비록 홈런 하나를 허용하며 무실점은 깨졌으나 플라이로 27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월드 시리즈의 문을 닫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팀 내 2선발의 월드 시리즈 3승이자, 시대의 지배자인 밥 깁슨을 꺾은 1968년 가을의 주인공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01년 랜디 존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
1968년 롤리치의 신화 이후 30년 넘게 멈춰있던 월드 시리즈 3승의 역사는 그렇게 세기를 넘겼다. 그렇게 21세기를 맞이한 메이저리그, 막내 구단인 디백스가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노크했다. 21승-372K로 당해 사이 영 상을 받은 랜디 존슨-커트 실링 원투 펀치와 클로저 김병현의 활약으로 일찍이 디비전-챔피언십 시리즈를 통과한 디백스, 그들의 상대는 월드 시리즈 쓰리핏의 왕조이자 9.11 테러의 아픔을 딛고 4연패를 노리던 뉴욕 양키스였다.
커트 실링의 7이닝 8K로 호투로 1차전을 제압한 디백스, 2차전 선발로 등판한 존슨은 아예 9이닝 3피안타 11K로 완봉승을 거머쥐며 쾌조의 기세를 이어갔다. 비록 3차전은 양키스가 승리했으나, 디백스가 4차전을 9회 2아웃까지 리드하며 시리즈의 끝이 보였는데 여기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김병현을 상대로 티노 마르티네즈의 동점 홈런-데릭 지터의 끝내기 홈런이 나오며 시리즈의 균형이 맞춰졌고, 5차전에서 스캇 브로셔스의 투런 홈런으로 다시 김병현에게 블론 세이브를 안겨준 데 이어 12회 소리아노의 끝내기 안타로 양키스가 3승을 선점한 것. 여유롭게 디백스의 우승으로 끝날 것 같던 시리즈의 향방은 단숨에 양키스 쪽으로 기울게 된다.


궁지에 몰린 디백스, 일단 6차전 선발로 등판한 존슨이 7이닝 6피안타 2실점 7K를 기록하며 팀에게 7차전을 선물했다. 이미 당해 포스트시즌 4승째이자 시리즈 2승째를 거둔 존슨의 7차전 등판은 요원해 보이던 상황, 그러나 실링의 7.2이닝 소화 후 믿을 불펜은 마땅히 없었고 팀의 선택은 전날 104구를 던진 ‘빅 유닛’ 랜디 존슨이었다.
8회 2아웃에 올라온 존슨은 플라이로 이닝을 마친 뒤 9회에도 올라왔고 플라이-땅볼-삼진으로 양키스 공격을 잠재우며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기는 양키스의 리드였는데, 타자들의 높은 집중력으로 양키스의 철벽 마무리였던 마리아노 리베라를 무너뜨리며 극적인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다. 소설과도 같던 디백스 가을의 마침표, 그리고 구원승과 함께 시리즈 3승을 완성한 존슨은 33년간 잠들어있던 가을의 신화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2025년 야마모토 요시노부-LA 다저스
21세기 메이저리그 첫 월드 시리즈 리핏을 노리던 다저스의 2025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선발진의 줄부상과 불펜진의 붕괴로 고전을 이어갔고, 결국 와일드 카드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많은 가을 야구 경험은 그들에게 든든한 자산이었고, 와일드 카드-디비전 시리즈-챔피언십 시리즈 전부 엘리미네이션 게임 없이 완파하며 피로 누적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이 과정에서 완투승을 포함 2승을 거두며 에이스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상대는 월드시리즈 승률 100%를 자랑하는 동부 지구 우승팀, 토론토 블루제이스. 1차전을 대패하며 분위기를 내줬으나, 야마모토가 2차전에서 4피안타 8탈삼진 완투승이라는 괴력으로 뜨겁던 토론토 타선을 차갑게 식혔다. 하지만 토론토의 저력은 매서웠다. 공방전 끝에 5차전을 내준 다저스는 2승 3패, 벼랑 끝에 몰린 채 원정길에 올랐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 팀을 구한 선수는 다시 야마모토였다. 6차전 선발로 나서서 6이닝 5피안타 1실점 6K로 시리즈 2승째를 거둔 동시에 시리즈를 7차전을 끌고간 것. 팀을 구해낸 일등 공신이었지만, 팬들은 24년 전 랜디 존슨의 이름을 떠올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미 200구 넘게 던진 그가 7차전 마운드에 오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는 언제나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서 탄생한다. 블루제이스의 선취점으로 시작한 7차전은 다저스가 8~9회 극적인 홈런 두 방으로 균형을 맞추며 9회 말로 향했다. 블레이크 스넬의 난조로 다저스는 끝내기 패배의 위기에 놓였고, 팀의 선택은 전날 선발이었던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등판. 첫 타자부터 몸 맞는 볼을 허용하며 만루 위기를 맞이했으나, 땅볼-플라이로 이닝을 마치며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결국 11회초 윌 스미스의 역전 홈런이 터졌고, 야마모토는 경기를 끝내기 위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 타자 2루타라는 위기 속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병살타를 유도하며 포효했다. 2-6차전 선발승과 7차전 구원승으로 완성한 2001년 랜디 존슨의 재림, 그것도 메이저리그 2년 차의 일본인 투수가 일궈낸 21세기 최초의 월드 시리즈 연속 우승의 순간이었다.
7전 4선승제의 승부에서 한 투수가 3승을 책임진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승리를 많이 챙겼다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벼랑 끝에 몰린 팀을 구하고 지친 동료들을 대신해 마운드를 지키며, 우승으로 가는 길을 홀로 닦아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 매튜슨의 3완봉승부터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기적적인 등판까지, 월드시리즈 3승의 역사는 곧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역사였다.
투구 수 관리와 분업화가 미덕이 된 시대에도 이 기록이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계산과 효율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계산이 지배하는 그라운드에서, 이 무모하고도 위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야구가 결국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경기’라는 사실을 묵직하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