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OB 베어스, MBC 청룡,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즈, 삼미 슈퍼스타즈. 총 6개 구단으로 출범한 KBO는 1986년, 7번째 구단이자 최초의 신생팀인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홀수 구단 체제로 바뀌며 대진이 없어 홀로 쉬는 팀이 생기는 기형적인 일정 소화가 이어진 것. 그들이 선택한 것은 8개 구단 체제로의 확장, 그리고 신생 구단 창단이었고, 그렇게 1991년 KBO에 8번째 구단이 탄생한다. 단 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구단이자 전주시를 대표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프로 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이야기다.


전주에 프로야구가 뿌리 내리다
시작은 1989년이었다. 일정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제8구단의 창단을 추진한 KBO는 본격 입찰에 나섰다. 이때 참여한 기업은 경상남도 마산시(現 창원)를 연고지로 내세운 한일합섬과 전라북도 전주시를 내세운 미원-쌍방울 연합. KBO는 이미 경북-경남에 한 팀씩 있는 것을 감안해 아직 팀이 없던 전주시를 제8구단의 연고지로 결정했다.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 팬들을 비롯한 호남 사람들의 반발이 상당했는데, 당대 최고 인기 구단이자 최강팀이었던 타이거즈의 전략을 약화하기 위해 전북에 신구단을 창단하려는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해태 전력의 핵심을 차지하던 군산상고 팜의 이탈 + 뛰어난 성적을 거두던 제2 홈구장인 전주 야구장 양보가 겹치며 해태의 손해가 막심할 것이라 판단했고, 해태 팬들의 창단 반대 운동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여기서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이1 찾아간 이는 다름 아닌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였다. 호남에서 절대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그가 “전북에 팀을 유치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히자, 반대 여론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렇게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게 연고지 분할 배상금 10억 원까지 건네며 전라북도 연고를 구입, 8번째 구단 창단이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미원-쌍방울의 연합으로 출발한 창단이 갑작스레 쌍방울 단독 창단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야구팬인 이의철 당시 쌍방울 사장이 자본금 50억 원 마련이 어려운 회사 사정에도 불구 야구단 창립을 강력히 원해 미원의 이름을 팔아 창단을 어필한 것이었다. 그들의 구단이 어떻게 몰락하고 또 사라졌는지, 그 결말을 알고 본다면 참으로 씁쓸한 사건의 발단이다.


호기로웠던 신인의 패기, 하지만
마침내 1990년 3월 31일 ‘쌍방울 레이더스’가 공식 창단했다.2 초대 감독은 김인식,3 훗날 ‘국민 감독’으로 불릴 그의 첫 감독 커리어이기도 했다. 1년간 2군 리그에서 담금질을 거쳤고, 1991년 1군 무대에 본격 등장. 이글스와의 창단 첫 경기에서 11-0이라는 완승을 하며 기분 좋은 시작을 알렸다. 모기업의 미비한 지원과 기존 팀들과의 체급 차에도 불구 돌격대의 활약은 나름 준수했고, 그 결과 LG 트윈스와 공동 6위 그리고 아직도 깨지지 않은 역대 신생 구단 최고 승률(0.425)을 기록했다. 구원왕 + 신인왕을 수상한 조규제의 활약까지 더해져 인상 깊었던 레이더스의 첫 해, 그러나 막내의 유쾌한 반란은 여기까지였다.


수습 기간이 끝난 막내에게 7개 구단 선배들의 자비란 없었다. 1995년까지 4년간 리그 최약체로 전락하며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진출 0회, 평균 승률 3할대 달성. 평균 팀 타율 및 팀 ERA, 팀 피홈런까지 전부 최하위를 기록했다.4 안 그래도 10,000석이 채 안 될 만큼 작은 전주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데 성적까지 밑바닥이니, 관중 수가 최하위인 것은 당연지사. 김인식-신용균-한동화로 이어지는 감독직은 아무도 2시즌을 넘기지 못한 채 옷을 벗어야만 했다. 특히 1995년 5월에는 구단 사장-단장-감독이 한꺼번에 경질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하기도.
부진의 가장 큰 요인은 역시나 아쉬운 모기업의 자금력 그리고 허술한 신인 스카우팅 능력이었다. 당시 전북 지역 야구부는 군산상고와 전주고 단 두 곳으로 원체 적긴 했으나, 1991년 조규제 이후 실패만 거듭했던 1차 지명은 스카우팅 능력 부족 그 자체였다. 결국 타 팀에서 방출됐거나 에이징 커브를 맞이한 노장 선수들의 영입만 이어졌으니, 장채근, 한대화, 박노준, 김광림,5 신경식 등이 대표적이었다.


1993년 4월 30일 프랜차이즈 스타 김원형의 역대 최연소 노히트 노런,6 1994년 김기태의 홈런왕 등극 및 3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7 등 간간히 희소식도 알렸지만 스타 선수 몇 명의 활약이 팀의 전성기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암흑만이 가득하던 돌격대의 상황, 그러던 1996년 팀의 운명을 완벽히 바꿔버리는 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김성근 감독이었다. 그렇게 쌍방울 레이더스의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


독기로 맞이한 첫 전성기, 돌격대가 질주하다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한 인물은 KBO 초대 총장이자 당시 레이더스의 구단주 대행을 맡고 있던 이용일이었다. 작전 야구 +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을 인물을 원했던 이 구단주는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을 맡고 있던 김성근을 전격 영입, 스카우트 자금만 이전 해의 4배 이상인 15억 원을 지급하며 전적으로 지원했다. 김성근 감독은 부임 직후 5년 연속 팀 피홈런 1위를 기록한 마운드의 약세를 메우고자 2.1m 펜스 위에 3.7m에 달하는 철망을 얹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벌떼 야구로 불린 무한 불펜 야구를 구사했다. 특유의 지옥 훈련으로 선수들의 기강을 다잡은 것은 덤. 그렇게 김 감독은 목표 승수 60승을 선언하며8 1996시즌을 맞이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 아니 ‘상상초월’이었다. 시즌 초반부터 여유롭게 5할 승률을 넘겼음은 물론, 단 한 차례도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70승 2무 54패라는 성적으로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한 것.9 30년 가까이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단일 구단 홈구장 최다 연승 기록인 17연승도 이 시절의 이야기다.10 원정팀들이 머물렀던 전주 코아호텔에서 선수들이 귀신을 목격했다는 기담이 나왔을 정도로 그들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전주 야구장에서 암표 장사가 시작된 것도 이 시절의 이야기, 즉 김성근의 쌍방울은 처음으로 전주에 야구 붐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야심차게 오른 첫 플레이오프, 상대는 정규시즌 4위이자 어마어마한 투자로 리그를 뒤흔들던 현대 유니콘스였다. 첫 홈 2경기 모두 한 점 차 승리로 장식하며 해태 타이거즈와의 호남 시리즈가 눈앞으로 다가오던 순간, 원정 3~4차전을 전부 패하며 시리즈는 동률로 돌아왔고 5차전마저 1-3 패배.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 팀은 유니콘스가 되었고, 레이더스는 최초의 리버스 스윕 패배라는 기록의 희생양이 되며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물론 돌격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듬해 팀 연봉 총액이 22억 원을 넘기며 리그 팀 연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모기업의 지원은 물심양면으로 이어졌고, 잠수함 김현욱의 구원 투수 20승, 김기태의 타격 3관왕 등 주축 선수들의 활약도 이어졌다. 그렇게 1승을 더한 71승 2무 53패로 정규시즌 3위에 올라 준플레이오프에 출전,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에 패하며 다시 한번 업셋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큰 경기 경험치가 부족한 선수들 + 우승 경험 없던 감독에게는 너무나 큰 성과였다. 꼴찌 담당 구단이 1위를 노크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었으니까.
이제는 정말 우승도 가능할 거처럼 보이던 순간, 또 다른 악재가 돌격대를 덮쳤다. 1997년 10월 14일 외환 위기로 인한 쌍방울 그룹의 부도였다.


돈이 무너뜨린 프랜차이즈, 역사가 끊기다
1997년 우리나라를 휩쓴 외환 위기의 여파는 KBO의 판도를 뒤바꿔놓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기업이 부실한 팀들의 수명을 끝장냈다. 이미 무주군 동계 올림픽 유치에 미친 듯이 투자하던 쌍방울 그룹이었는데, 국가적 위기까지 터지니 기업 자체가 휘청였고 그들의 선택은 현금 트레이드였다. 그렇게 투타의 주축이었던 김기태, 박경완,11 조규제, 박성기, 김실이 전부 팀을 떠났다.12
아무리 감독이 뛰어나다 한들 구단 수뇌부의 의지가 없으면 결코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의 작전 야구도, 돌격대의 기적도 여기까지였다. 아니 이 상황에서도 1998시즌을 6위로 마친 게 기적이었다. 이 와중에도 구단 사정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듬해 그들의 결정은 또다시 현금 트레이드. 심지어 신인 지명권까지 판매하며 연명하는 최악의 판단을 이어갔다.13
핵심 선수라고는 조원우, 최태원, 김원형, 심성보 정도뿐. 이마저 조원우는 수비 중 고관절 부상, 김원형은 장종훈의 타구에 맞으며 안면 함몰,14 심성보는 당뇨병으로 인한 커리어 하락이라는 온갖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팀 순위는 말 그대로 환승역 없는 8호선, 김성근 감독은 결국 1999년 올스타전 직후 경질되며 3년 반 동안의 레이더스 감독직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17연패를 비롯해 전력이 주저앉아버린 쌍방울 레이더스의 1999년 성적은 28승 7무 97패, 승률은 단 0.224였다. 불과 2년 전 71승을 거둔 팀이 모기업의 부도로 완전히 박살 난 것이다. 그리고 시즌 후 쌍방울 레이더스는 모기업의 팀 운영 불가 판단을 받으며, KBO에 의한 위탁 관리 체제로 돌입한다.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프랜차이즈가 휘청이자 KBO는 다시 여러 기업의 문을 두드렸다. 마치 10년 전 그때처럼 아직 야구단을 운영하지 않던 대기업들을 찾았고, 그들이 접촉한 기업은 바로 SK였다. 그리고 KBO 입성에 관한 SK의 반응은 꽤 호의적이었다. 이렇게 프랜차이즈의 계보가 이어지는 듯했는데, SK는 전혀 다른 방향을 원하고 있었다. 바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후신이 아닌, 신구단 창단이었다. 2000년 2월이면 자동 퇴출당하는 쌍방울에 SK는 무리하게 인수를 제안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의 해체를 기다리고 선수단만 인수하면 그만이었다.
더불어 SK는 기업과 연이 없던 전주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수도권 입성을 원했던 그들은 수원 or 전주라는 KBO의 제안을 거절,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 수원으로 향하며 자연스레 SK는 인천을 연고지로 정하게 된다. 레이더스를 살리기 위한 전주 시민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전주 출신의 여러 연예인은 ‘쌍방울 살리기 바자회’에 나섰으나 이미 기업의 상황은 바자회 몇 번으로 살아날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선수들은 전부 웨이버 공시되었고, 2000년 1월 7일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되었다. 창단 10주년을 불과 2개월 앞둔 때였다. 이렇게 전주 야구의 맥이 끊겼다.15


추억은 방울 방울, 전주 야구는 깨어날 수 있을까
세상에 대체할 수 없는 자리는 없다. 빈약한 재정에 살림을 겨우 유지하던 쌍방울과는 달리 SK는 자금이 매우 풍부한 대기업이었고 인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한 거액의 투자와 스포테인먼트도 이어졌다.16 팀 성적은 빠르게 올랐고, 관중 수 역시 급증. 거기다 레이더스는 한번도 이루지 못했던 우승도 연달아 거머쥐며 빠르게 KBO의 핵심 구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시절 SK 와이번스의 감독은 쌍방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성근이었다. 이후 NC 다이노스-KT 위즈가 연이어 창단하며 어느덧 KBO는 10구단 체제 10주년을 맞이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전주에게 단순한 야구단 이상의 존재였다. 열악한 자금 속에서도,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던 선수들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는 짧지만 유난히 뜨거웠다. 2000년 그 후로 프로야구는 전주를 떠났고, 어느덧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과연 고요한 전주 야구 팬들의 마음에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아픈 추억을 치유해줄 순간이 돌아올까. 여전히 그들은 돌격대와 함께한 청춘을 떠올리고 있다.
- 상단 사진 속 우측 인물, 훗날 쌍방울 그룹 부회장직까지 맡게 된다. ↩︎
- 영어로는 ‘Raiders’, 침략자, 돌격대라는 뜻이다. ↩︎
- 이용일 총장 사진 옆, 흑백 사진 속 인물. 해태 타이거즈 수석 코치로서 김응용 감독을 보좌하던 중 이적한 것이다. ↩︎
- 팀 피홈런 1위는 1군 입성 첫 해인 1991년부터였으니, 무려 5년 연속 팀 피홈런 1위였다. ↩︎
- 기량이 하락해 합류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김광림은 타율 3할을 기록하고도 OB 베어스에서 트레이드 되었는데 장타력 부족 + 30대 중반을 향하던 나이가 그 이유. 결과는 쌍방울의 대승이었다. ↩︎
- 만 20세 9개월 25일, 지금도 보기 드문 미소년 + 로컬 보이 + 프랜차이즈 스타였기에 전주 내 그의 인기는 다른 선수들과도 궤를 달리했다. ↩︎
- 최초의 좌타자 홈런왕이자 역대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자, 쌍방울 시절 워낙 집중 견제를 받은 탓에 그의 통산 출루율은 4할이 넘어간다. ↩︎
- 참고로 1995년 5위를 기록한 삼성 라이온즈의 승수가 60승이었다. 즉, 김성근 감독도 첫 해 목표는 끽해야 중위권이었던 것. ↩︎
- 더불어 8월 중반 13연승을 질주하기도 했으니, 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
- 1996년 8월 14일~1997년 4월 13일 ↩︎
- 단언컨대 쌍방울 레이더스가 키워낸 최고의 선수. 1996년 골든 글러브 수상자이자 훗날 유니콘스-와이번스 왕조 수립의 기반이 된 KBO 사상 첫손에 꼽히는 레전드 포수다. ↩︎
- 한편 1996년~97년 연속 우승을 쓸어 담던 해태 역시 모기업의 부도로 선수들을 타팀에 팔아넘기기 급급했다. ↩︎
- 이를 계기로 KBO는 신인 지명권 거래를 금지하였다. 지명권 거래가 부활한 것은 20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
- 아이러니하게도, 김원형은 이 부상으로 인해 타 구단으로 트레이드 되지 않은 채 레이더스의 원클럽맨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그는 레이더스-와이번스로 이적 없이 21년을 뛴 레전드가 되었다. ↩︎
- 쌍방울이 받은 돈은 SK가 납부한 리그 가입금 중 일부인 위로금 70억 원 뿐이었다. 매각 대금으로 240억 원을 희망했던 것을 감안하면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거래였다. ↩︎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주, 그리고 쌍방울’은 철저히 배척하며 그들의 역사가 잊히는 데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쌍방울이 그 이전에 사라진 삼미-청보-태평양보다 더 인지도가 떨어지는 결정적인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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